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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사상 <1> ‘거짓 망국론’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는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을 나이 16세 때 경험하고 평양에 진주한 청나라 군대와 일본 주둔군을 보고 “조선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각성하고 서울로 공부하러 간다.

언더 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 교리를 배웠다. 실업 교육도 받고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주식회사와 공장을 설립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세학당의 후신은 연세대학교이고 훗날 도산은 연세대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도산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서재필인데, 그는 배재학당 강사로 토론을 하는 협성회를 조직하고 시국토론을 통해 계몽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서재필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했고,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한다. 안창호는 쾌재정 만민공동회의 특별한 연사로 활동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도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은 1895년에 개화기의 사상가인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서양, 일본, 유럽, 미국의 제도와 문물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 방향 제시한 책으로, 도산은 서유견문을 읽고 서구 문명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좋은 것은 살리고, 나쁜 점은 조선 실정에 맞게 고치겠다.”는 점진적 개혁을 부르짖었다.

도산은 한문과 유학 공부를 하였고 ‘협성회’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후 흥사단은 3.1 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흥사단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 중이다. 

도산 정신의 첫번 째 순서로 ‘거짓망국론’을 알아보자. 도산 선생은 정직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잘못된 습성을 ‘거짓말’과 ‘거짓행실’, 즉 정직하지 못함이라 잘라 말했다.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등 독립운동을 위해 시작됐던 여러 결사조직들이 3년 이상 지탱하지 못한 것도 횡행한 거짓으로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도산이 고국에 돌아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의 교육목표 역시 ‘정직’이었다. 그는 늘 학생들에게 “생도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과 속이는 일이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고 강조했다.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는 그의 말은 선생이 얼마나 정직을 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도산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항상 ‘거짓 말 하지 말자’하여 참되기를 가르쳤다. 한번은 한 학생이 결석계를 제출했는데 남의 도장을 슬쩍 찍고 비벼서, 선생님을 속이려 하였다. 도산은 그 학생에게 엄한 벌을 주면서 “이것이 비록 작은 일 같지만 우리 대성학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짓이니, 박절하지만 중벌을 줄 수밖에 없소. 이런 정신으로 공부를 한다면 세상없는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소, 우리 대성학교에 이런 학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라고 말하였다. 또한 약속을 지키는 일, 시간을 지키는 일도 무실 정신이라 가르쳤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도산은 독립운동으로 체포돼 일본 형사 앞에 섰을 때도
당당했다. 활동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 일본 형사의 질문에 안창호 선생은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대한의 독립은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답했다. 그리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의 독립을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라고 말하며 깊은 신앙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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